03 / NOTES
NOTES FROMTHE EDGE.
완성된 결론보다 판단이 갈린 자리를 적습니다. 제목을 누르면 본문이 그 자리에서 펼쳐집니다.
쓸모가 같은 물건 두 개를 놓고 하나를 고를 때, 사람들은 대개 «어느 쪽이 나은가»를 묻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나를 덜 불편하게 하는가»를 봅니다. 그 순간 물건은 기능이 아니라 태도가 됩니다.
작업실에서는 이걸 «손이 먼저 아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손잡이 각도, 뚜껑이 닫히는 소리, 상자를 여는 순서 같은 것들입니다. 도면에 적히지 않는 자리라서, 시제품을 손에 쥐어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불편을 없애는 것이 좋은 설계는 아닙니다. 뚜껑이 한 번에 열리지 않는 약통, 두 손을 써야 하는 커터. 이런 불편은 이유가 있어서 남겨 둔 것입니다.
문제는 이유 없이 남은 불편입니다. 보기 좋으라고 손잡이를 얇게 만들고, 여백을 지키려고 글자를 작게 두는 일. 우리는 작업을 넘기기 전에 «이 불편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한 번 더 묻습니다.
성수동 골목의 7평짜리 금속 작업실을 찾아갔습니다. 기계 세 대가 벽을 따라 서 있고, 가운데는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큼만 비어 있었습니다.
그 좁은 자리에서 물건의 크기가 정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계 사이를 지나갈 수 있는 폭, 혼자 들 수 있는 무게. 도면보다 먼저 정해지는 치수가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플라스틱을 덜 쓰는 것과 오래 쓰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 포장보다, 10년 쓰는 플라스틱 상자가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판단 기준을 «재료»가 아니라 «쓰는 기간»에 두면 설계가 달라집니다. 부러질 자리를 정해 두고, 그 부품만 갈아 끼우게 하고, 색이 바래도 알아볼 수 있게 형태를 만듭니다.
새 프로젝트의 첫 주에는 도면을 그리지 않습니다. 종이를 접고, 골판지를 자르고, 나무 막대를 붙여 크기만 확인합니다. 정확하지 않아도 손에 쥘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화면 안에서는 모든 치수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실제 크기로 접어 보고 나서야 «이건 손에 안 잡힌다»는 판단이 나옵니다. 도면은 그 판단이 끝난 다음에 그립니다.
색을 세 개 쓰면 세 개의 규칙이 필요합니다. 어디에 얼마만큼, 어떤 순서로. 규칙이 늘어날수록 만드는 사람마다 결과가 달라집니다.
하나만 크게 쓰면 규칙은 «여기 아니면 저기» 하나로 줄어듭니다. 인쇄소가 바뀌어도, 담당자가 바뀌어도 같은 인상이 남습니다. 절약이 아니라 유지의 문제입니다.
손잡이는 대개 마지막에 붙입니다. 몸통을 먼저 만들고 남은 자리에 붙이니, 각도는 형태에 따라 정해집니다.
순서를 바꿔 보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붓는 동작을 먼저 촬영해 손목이 꺾이지 않는 각도를 재고, 그 각도를 고정한 채 몸통을 맞춥니다. 형태가 조금 어색해져도 쓰는 동작은 편해집니다.
촬영용 배경 위에서 좋아 보이는 물건은 많습니다. 문제는 그 물건이 실제로 놓이는 자리입니다. 식탁 끝, 세면대 옆, 현관 신발장 위.
그래서 시제품이 나오면 작업실이 아니라 집으로 가져갑니다. 2주쯤 쓰다 보면 «여기 놓으면 걸린다», «이 각도에서는 안 보인다»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이 다음 도면의 첫 줄이 됩니다.